TOP 10 미전도종족 국가들 소개

  • 인도(2,444 미전도종족): 가장 많은 신과 함께 사는 나라
  • 파키스탄(501 미전도종족):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과의 끝없는 전쟁
  • 중국(445 미전도종족): 공산주의가 막고 있는 종족 개척
  • 방글라데시(301 미전도종족): 남아시아 이슬람권의 또다른 장벽
  • 네팔(275 미전도종족): 힌두국가를 고집하는 산악 민족들
  • 인도네시아(235 미전도종족): 현대화속에서도 이슬람 수호에 목매는 이들
  • 수단(130 미전도종족): 인종청소의 오명을 쓴 이슬람 정권의 퇴보
  • 러시아(117 미전도종족): 공산주의 망령을 그리워하는 사람들
  • 라오스(109 미전도종족): 순수하지만 이데올로기에 얽매여 사는 사람들
  • 이란(84 미전도종족): 시아파 이슬람의 종주국 면모를 보여주는 나라

2천년 선교의 나라 인도

예수님의 제자 도마와 바돌로메가 와서 선교를 시작했다고 알려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선교 역사를 가진 나라중 하나. 근대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엄 캐리가 선교를 시작하고 저명한 선교사들이 거쳐갔던 나라. 지금도 선교 자원이 가장 많이 투입되는 나라중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에서 미전도종족이 가장 많이 남은 나라, 인도. 도대체 어떠한 선교적 장애물이 복음 전파를 막고 있는 것일까? 지금까지 우리가 해오던 선교 방법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힌두교, 가볍게 볼 종교가아니다

인도는 힌두교의 발상지이며 가장 많은 인구가 힌두교를 믿는 나라이다. 힌두교를 유일신을 믿는 종교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3억 3천만개의 신을 믿는다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온갖 귀신들이 들끓는 나라라고 이해하고, 어떤 사람들은 모든 종교의 근원지라고 치켜 세운다. 불교, 시크교, 자이나교등도 모두 힌두교에서 파생된 종교이고 모든 종교를 수용하는 것이 힌두정신이라며 기독교도 힌두의 범주안에 있는 한 종교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도대체 힌두교가 무엇이길래 이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것일까?

힌두교는 간단하게 말해서 다양한 종교(신앙)과 수많은 종교적 행위들을 모두 통합하여 인정해 주려는 포괄적인 사상체계라고 할 수가 있다. 그래서 이것을 한 종교로 이해해서는 안되고 모든 종교를 담는 큰 그릇같은 것이 힌두사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실제 우리가 복음을 전하면 쉽게 받아 들이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구세주로서 오직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3억 3천만개의 신 가운데 하나로 예수라는 신을 믿는 것이다.

힌두교를 유일신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렇게 많은 신을 믿어도 구원(해탈)을 할 수 있는 은혜를 주는 신은 오직 한 분뿐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외의 수많은 신들은 유일신의 현현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 근원되는 신이 누구인지는 종파마다 다르다. 비슈누 종파 계열은 근원적 신으로 비슈누신를 믿고, 시바 종파 계열은 시바신을 믿는다.

그리고 힌두교가 믿는 구원은 자유, 즉 출생과 죽음이 계속 반복되는 윤회의 고통과 속박으로 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경지에 이르려면 끝없는 고행과 선행을 이루어야 하는데 지금 이생에서 그것을 다 못채우면 다음 생에서 또 그 과정을 겪어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가 건강법으로 오해하고 있는 ‘요가’는 힌두교도들이 수행을 하는 하나의 방법인데 Karma 요가는 순결과 절제, Jnana 요가는 인간 본성을 깨닫게 하고, Bhakti 요가는 신과 교제하고 연합하는 수행법으로 활용한다. 근대 힌두사제들이 힌두교를 남아시아의 경계를 넘어 세계로 확산하는 전략으로 요가를 이용했고 서구에서 인기를 끌면서 힌두교의 영향력이 전세계로 확산하는 결과를 낳았다. 

어쨋든 우리가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의 메시지는 힌두교도들에게는 너무 쉬운 개념이어서 무시하는 사람들이 많다. 인간의 죄는 누군가 대신 치러줄 수가 없는 것이고 그렇게 고행과 피나는 노력없이 구원을 받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오직 자신이 지속적인 행위로만 구원이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설명할 때 활용할 수 있는 유사한 사상도 갖고 있는데 인간은 육체나 물질이 아니라 영이라고 믿는 것이나, 신의 본질은 진리, 생명이요 완전한 신인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라고 믿는 것은 복음을 이해시키는데 도움을 주는 요소이기도 하다. 

인도 사람들은 이런 힌두교를 태어날 때부터 믿고 자라기 때문에 종교적 의식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 복음을 듣고 관심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완벽하게 복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장시간의 성경공부가 수반되어야 한다. 

최근에는 힌두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핍박의 빌미로 사용하고 있다. 2014년 모디가 이끄는 인도인민당(BJP)이 정권을 잡고 2019년 재선에 성공하면서 힌두로의 복귀운동이 점점 더 힘을 받고 있다. 그들은 인도는 힌두의 나라이고 인도인은 전통적으로 힌두 문화를 중심으로 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타종교로의 개종을 강요하는 것은 인도인의 정체성, 역사성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한다.

이런 힌두정신 중심의 국가 건설이라는 사회적 분위기는 교회를 핍박하고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학대로 이어졌다. 오래전 오리사 지역에서 일어났던 기독교인에 대한 대규모 학살같은 눈에 띄는 사건을 일어나지 않지만 지역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교회당 파괴와 예배 방해, 힌두교로의 재개종 강요같은 활동이 지속적으로 자행되고 있다. 모디총리 정부 자체가 과격 힌두운동권이 모태이고 정부 요직과 국회의원들 중에도 타종교에 대한 과격한 행동과 주장을 일삼던 이들이 장악했기 때문에 과격 힌두운동은 정권이 바뀌지 않는한 개선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정권 유지 차원에서도 힌두복원운동 활성화는 그들에게 득이 된다. 보통 기독교인이나 무슬림, 세속주의자들은 과격 힌두 정치인들에게 투표하지 않는다. 그래서 힌두교도들이 자꾸 개종하게 되면 힌두정당 지지자들을 잃게되는 결과이기 때문에 정권 수호 차원에서도 개종을 금지하고 기독교인이 되었다가도 다시 재개종하도록 법적으로, 정책적으로 압박을 가하는 시도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선교를 막는 힌두교는 인도 선교의 가장 큰 장애물이라고 할 수가 있다. 

헤아릴 수 조차없는 종족과 언어 숫자

인도에는 2,717 종족이 모여 산다. 센서스 통계에 의하면 1,599개 이상의 언어가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인도 현지인 사역자는 차를 타고 5Km만 가면 다른 언어, 다른 종족이 나온다는 식으로 수많은 종족과 언어를 표현한다. 

인류학자들은 이들 종족을 6개의 주요 인종군으로, 그것을 다시 3개로 크게 분류하기도 하는데 ‘인도-아리안종족'(72%), 드라비다 종족(25%), 몽골계 종족(3%)이다. ‘인도-아리안 종족’은 중앙아시아에 살던 아리안족이 주전 1세기경에 인도 서북부로 침입하여 인더스강 상류에 정착하여 살면서 현지인들과 혼합된 사람들을 말한다. 아리안족의 일부는 유럽으로 건너가 독일등지의 유럽인으로 자리를 잡았는데 그 아리안족과 구분하기 위해 인도-아리안종족이라고 부른다. 인도 사람들중에 키가 크고 백색 피부에 높은 코를 가진 유럽인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이에 속한다. ‘드리비다 종족’은 인도 남부 지역에 주로 거주하고 검은색 피부를 가진 사람들이다. ‘몽골계 종족’은 북동부 지역에 집중적으로 살고 있는데 한국인들과 정말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선교적으로 이렇게 3개의 큰 집단으로 구분하는 것이 도움이 되는 이유는 복음화율이 이 구분과 같기 때문이다. 인도 남부와 북동부는 복음화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반면 인도-아리안종족이 주로 거주하는 북인도는 선교가 열악한 지역이다. 드라비다 종족이 주로 거주하는 남인도의 Kerala(18.38%), Puducherry(6.29%), Tamil Nadu(6.12%)주 등은 북인도로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던 지역이기도 하다. 그리고 북동부의 Nagaland(87.93%), Mizoram(87.16%), Meghalaya(74.59%), Manipur(41.29%)등의 주에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물론 100여년전에 기독교를 받아들인 곳이라 명맥뿐인 기독교인들도 많다고 하지만 다른 지역에 비해 가장 많은 신학교, 신학생이 존재하는 곳이고 현지인 목회자들중에는 열정적으로 사역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서 선교지라기 보다는 선교사 파송지로서 역할을 해야할 곳이다. 

반면에 북인도의 실정은 아주 열악한데 수도 델리는 기독교인 비율이 0.87%, 인구 2억명의 우타르 프라데쉬주의 기독교인은 0.18%에 불과하다. 그래서 지역별로 본다면 북부 인도에 선교를 집중해야 할 필요가 있고 북인도를 넘어야만 인도의 선교는 정상궤도로 들어설 수가 있다. 

그렇다면 남부와 북동부의 그리스도인 사역자들이 북인도로 가서 사역을 할 수는 없을까? 물론 가능하다. 한국이 선교사 파송국가 순위에서 상위로 올라오기 전에는 인도가 항상 2위였다. 남인도의 현지인 선교사들이 북인도에 파송된 결과이다. 같은 나라라해도 남인도 사람이 북인도로 가면 언어와 문화를 새로 배워야 한다. 또 북동부의 그리스도인은 어떨까? 이 사람들도 다른 지역으로 가면 언어를 배워야 하는 어려움이 있지만 가장 큰 장애물은 인종차별이다. 인도-아리안 종족들은 북동부 출신들을 중국인이라고 생각하고 외국인으로 여겨 차별과 학대를 가한다. 그래서 북동부 출신 그리스도인이 북인도로 가서 선교하는 것은 장점보다 단점이 더 많다. 

수많은 인종과 언어가 존재하는 것은 선교사에게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이다. 도시의 중산층을 만나거나 대학 졸업자들은 영어로 소통이 가능하지만 도시를 벗어나면 토착언어외에는 소통이 불가능하다. 사역하던 지역을 옮기면 그 지역의 언어를 또다시 배워야 하고, 지역마다 다른 문화적 차이를 배우려고 하다가 사역을 끝내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리고 단일언어, 단일 인종권에 살던 한국인의 경우는 다인종, 다언어 문화에 익숙지가 않아서 그들을 이해하는데 애를 먹는 경우도 종종 있다.  

기독교는 하층 카스트의 종교인가?

선교의 또다른 장애물은 카스트 제도이다. 힌두교는 출생에 따라 일정한 계급에 속하게 되고 죽을 때까지 속한 카스트를 바꿀수 없다.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야(윤회) 카스트가 바뀌는데 다음 생에서 더 나은 카스트로 태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지금 자신의 처지를 인지하고 최선을 다하여 의무를 완수하면 후세에 더 나은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가 어릴때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할머니들이 ‘전생에 뭔 죄를 졌길래…’하며 한탄하던 것을 들은 적이 있을텐데 그것이 이 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부자인 사람과 가장 가난한 빈민가가 폭동없이 잘 공존할 수 있는 이유도 이런 사고에 기인한 것이다. 부자로 사는 사람은 전생에 뭔가 열심히 한것이 있어서 당연히 받는 것이라고 여기고 그것에 대해 반항하거나 거부하는 것은 신에대한 공격이라고 믿어 순응한다. 

카스트 제도는 약 3천 년 전에 힌두교도들을 각각의 경제, 사회적 역할로 구분 짓기 위해서 생겨났다. 고대 인도의 마누 법전에는 카스트가 ‘힌두 사회의 질서와 규칙의 근간’이라고 적혀 있는데, 카스트는 크게 브라만과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로 구성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혈통과 지역, 직업에 따라 3천 개의 카스트로 나뉜다. 또 그 중에서도 하위 계급은 다시 25,000개 계급으로 구성돼 있다. 각각의 카스트는 저마다 다른 성씨를 쓰고 있으며, 담당하는 일도 다른데, 다른 카스트와의 결혼이나 신분 간의 이동은 거의 불가능하다. 지금도 다른 카스트의 남녀가 데이트를 했다거나 결혼을 시도한다는 이유로 화형에 처하거나 가족이 살해하는 ‘명예살인’ 사건이 신문에 자주 보도된다.  

그런데 인도 그리스도인의 70%가량이 하층 카스트에 속해 있다. 우리에게 불가촉천민으로 알려졌고 카스트의 범주에도 들지 않는 ‘달릿(Scheduled caste)’과 ‘부족(Scheduled tribe)’이 41.80%에 달하고 하층 카스트 출신들이 24.80% 가량이다. 최근들어 상층 카스트에서도 많은 수가 그리스도인이 되면서 그 비율이 높아지기는 했지만 브라만이나 크샤트리아와 같이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들중에는 아직도 그리스도인의 수가 현격하게 적다. 그래서 사람들은 인도의 기독교를 하층민의 종교로 이해하기도 한다. 

이것은 선교 대상을 넓혀 가는데 아주 큰 장애물이 되고 있다. 상층 카스트에 속한 사람은 기독교를 아예 무시하기 때문에 접근하기가 어려울 때가 많다. 그리고 상층 카스트에 속한 사람이 예수를 믿고 싶어도 사회적으로 조롱거리가 되거나 가족에게서 핍박을 받기 때문에 개종을 못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런 현상은 사실 선교전략의 오류에서 비롯되었다. 인도에서 사역하는 한국 선교사의 토로에 의하면 파송한 한국교회나 교단에서 결과 위주의 보고를 원하고 교회 성도들도 건물이나 사람의 숫자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를 만드는 하층 카스트를 대상으로 사역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시간이 오래 걸리고 열매를 얻기가 어려운 상층 카스트를 선교하는 이해가 필요하고 투자를 해야 한다. 

자립하지 않는한 미래는 없다

서구 교회들이 주도했던 근대 인도 선교의 문제점중 하나는 제국주의 선교이다. 식민 제국주의 권력과 함께 들어온 선교사들은 나름대로 복음적인 사역과 활동을 하려고 노력했지만 현지인들의 눈에 비친 그들은 제국주의자들과 다를바 없었다. 그런데 최근에 이르러서 한국교회의 인도선교가 신제국주의 선교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경제적으로 좀 나은 나라에서 왔다는 자부심과 돈을 통제하는 상황때문에 현지인들을 섬기고 세우기 보다는 종부리듯 한다는 비판이다. 

또 파송한 교회 성도들이 교회당 건축이나 눈에 보이는 결과물에 너무 집착하다 보니 선교가 인도 땅에 뿌리를 내리도록 돕기보다는 프로젝트를 쫒아 가다가 선교사들은 탈진하고 결국 영혼 구원과 성경을 가르치는 사역은 할 수 없는 지경으로 내몰린다고 한다.

윌리엄 캐리가 근대 선교의 아버지로 좋은 영향력을 미쳤음에도 불구하고 비판을 받는 이유는 너무 많은 프로젝트를 벌리다 보니 그 재정 압박에 시달리고 에너지를 그것들 유지 관리하는데 쏟느라 정작 말씀을 가르치는 사역은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성경을 번역하고 그것을 인쇄하기 위해 인쇄 공장, 종이공장을 세우고, 수많은 학교를 세웠다. 당시에는 인도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역들이었지만 너무 많은 부동산을 감당할 후원금을 충당하지 못해 빚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래서 1800년 이후 그는 30년동안 거의 설교를 한 적이 없으며 말씀을 가르치는 사역이나 사람을 세우는 사역은 하지 못하고 사업만 하다가 결국 그 선교회는 문을 닫았다고 한다. 

이처럼 인도 선교에서는 넘어야 할 선교적 과제들 중에서 핵심적인 것은 현지인 주도의 선교가 일어나도록 돕는 것이다. 인도 교회와 사역자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사는 것은 맞지만 그렇기 때문에 재정적인 지원을 무분별하게 하는 것은 몇백년이 지나도 의존적인 나라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현지인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돕는 길은 재정을 지혜롭고 전략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첫걸음이다.

먹이시고 입히시는 분이 우리가 아니고 주님이라는 확실한 믿음을 갖도록 도와야 하며, 그런 의식으로 사역하고 성도들을 가르쳐야 성도들도 물질로 헌신할 수가 있다. 또 당장 가난하고 먹을 것이 없다고 재정을 직접 지원하기 보다는 장기적인 전략을 가지고 자립프로그램을 개발해 주는 것이 좋다.  그래야만 책임감도 생기고 의존적인 사고도 바꿀 수가 있다. 그리고 이런 전략은 모두가 같이 해야한다. 열심히 자립 프로그램을 정착시키려고 발버둥을 치는데 옆에서는 재정을 직접 지원해 주면 현지인 사역자들은 아무래도 쉬운 길을 찾아 떠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영적으로도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영적 자립이라 함은 스스로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가르치고, 다른 지도자들을 훈련할 수 있도록 영량을 갖추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몇개월이나 몇년내에 할 수 있는 단기 전략이 아니라 평생 재교육 프로그램처럼 운영하면서 현지인들이 스스로가 영적으로 건강해 지도록 돕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자립할 수 있도록 돕는 근본적인 의식은 우리가 선교를 하더라도 그 열매가 내것이 아니라는 의식을 갖는 것이다. 영적으로도 그것이 맞다. 선교의 주인은 주님이시고 주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셔서 그 선교를 감당할 뿐이지 내가 열매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것은 매우 어려운 실천 영역이다. 후원하고 기도하는 분들에게 보고하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스스로가 웬만한 각오가 아니면 실천하기가 어렵다.

개인적으로 그런 상황에서 갈등하고 힘들었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에 목숨을 걸고 밭을 갈고 사역을 준비하고, 현지인 사역자들을 발굴하고 격려하고 키워서 사역을 시작했는데 거기에서 모든 것을 위임하고 돌아서 나와야 하는 상황,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다 했는데 엉뚱한 사람이 군중의 박수를 받는 상황이라고 할까….

그런데 그렇게 해야한다. 현지인을 주인으로 만들어 주려면 그들에게 사역의 열매를 거두는 기쁨을 맛보게 해야 한다. 우리들은 나룻배에 불과하다는 의식을 갖게 해야한다. 우리가 선장이고 우리가 하고 싶은대로 하면서 현지인 사역자들은 돕는 일꾼 정도로 만들어 버리면, 그들은 우리가 원하는대로 시중은 들지 모르지만 절대로 선장의 자리로 올라오지 않는다. 2천년의 선교 역사가운데 뼈아프게 반성이 되는 것은 그들이 주인되는 선교를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